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홍사용에 대한 종합적이고 다각적인 연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이처럼 연구가 미흡한 데는 우선 몇 가지 중요한 작품이 발굴되지 못하는 등 문학 활동의 전모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고, 작품 편수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홍사용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미학적으로 우수하다는 쪽보다는 ≪백조≫ 창간에 참여한 시인으로서 갖는 문학사적 의의에 의미를 두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이는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비롯한 몇몇 시 작품이 홍사용 문학을 대표하는 것인 양 평가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홍사용 시 작품을 거의 모두 수록했고, 그의 민요 시론을 엿볼 수 있는 평론 <朝鮮은 메나리 나라>를 부록으로 실었다. 비록 만족할 만한 미학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식민지 현실을 민족적 양식에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200자평
노작 홍사용은 ≪백조≫ 창간에 주도적으로 참여, 1920년대 낭만주의 시류에 서 있었던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시뿐만 아니라 소설과 희곡을 창작했으며 극단 ‘토월회’에 참여해 재정 지원을 하는 등 연극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또 민요시 논의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지은이
홍사용(1900∼1947)은 경기도 용인 및 화성 일대에 넓은 농토를 소유했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고, 1916년 17세에 이르러 휘문의숙에 입학하기까지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홍사용 문학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향토적 정서와 전통에 대한 지향은 이러한 환경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홍사용이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문우≫(1920)에 <새해>, <크다란 집의 찬 밤>, <철모르는 아히가>, <벗에게>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다. 박종화, 정백 등 ≪서광≫을 창간했던 멤버들이 계간지를 목표로 한 순문예지를 지향하며 내놓은 것이 ≪문우≫인데 홍사용은 거기에 ‘새별’이라는 이름으로 <새해>라는 권두시를 발표하고 더불어 ‘소아’라는 아명으로 3편의 시를 발표했다. ≪문우≫는 뜻한 바대로 계간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창간호를 끝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후 홍사용은 1922년 1월 ≪백조≫를 발간하는 데 재정적 지원을 비롯한 뒷받침을 아끼지 않았다. 1924년 <회색의 꿈>이라는 ‘토월회’ 공연을 번역 연출하기 전까지, 홍사용이 남긴 시는 대부분 이 시기에 창작되어 주로 ≪백조≫와 ≪동명≫에 발표되었다. 초기부터 민요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던 홍사용은 1928년 <조선은 메나리 나라>(≪별건곤≫ 12·13호)라는 민요시론을 발표한다. 1923년부터 토월회에 관심을 보이며 문예와 연기 지도를 맡기도 했다. 3회 공연에서 <회색의 꿈>을 번역해 올렸고, <무정>, <개척자>, <재생> 등 이광수의 소설을 각색하기도 했다. 토월회가 내분으로 해산되자 박진 등과 함께 ‘산유화회’를 조직해 노작의 작품 <향토심> 등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지만 ‘산유화회’ 역시 곧 해체되고 만다. <산유화> 등 그의 창작 희곡은 주로 민족의식의 고양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희곡 창작 및 극단 활동은 민요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그의 ‘민족’ 지향의 표출로 볼 수 있으며 문화적 활동을 통해 현실에 참여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일제의 군국주의가 심화되던 1930년대 홍사용은 민요시 <월병>(≪月刊每申≫, 1933) 등을 발표하기도 하지만 방랑 생활을 하며 작품 활동은 뜸한 편이었고, 1939년에는 희곡 <김옥균전>을 썼으나 총독부 검열에 걸려 주거 제한까지 받았다가 이후 절필했다. 해방 후에는 근국청년단(槿國靑年團) 운동에 참여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47년 폐병으로 사망했다.
엮은이
차성연은 1972년 서울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만주 이주민 소설의 주권 지향성 연구>, <한국 근대문학의 만주 재현 양상 연구> 등이 있다.
차례
푸른 언덕 가으로
비 오는 밤
白潮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꿈이면은?
통발
漁父의 跡
풀은 江물에 물노리 치는 것은
시악시 마음은
봄은 가더이다
民謠
별, 달, 또 나, 나는 노래만 합니다
희게 하야케
바람이 불어요!
키쓰 뒤에
그러면 마음대로
노래는 灰色−나는 또 울다
해 저믄 나라에
어머니에게
그이의 畫像을 그릴 제
흐르는 물을 붓들고서
커다란 무덤을 껴안고
시악시의 무덤
그것은 모다꿈이엇지마는
나는 王이로소이다
寒蟬
月餠
각시풀
시악시 마음이란
붉은 시름
離恨
감출 수 업는 것은
고초 당초 맵다 한들
호젓한 걸음
부록: 평론
朝鮮은 메나리 나라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는 王이로소이다 나는 王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 아들 나는 王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十王殿에서도 쫏기어난 눈물의 王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러케 어머니께서 무르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바든 것은 사랑이엇지오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겟나이다 다른 것도 만치오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러케 어머니께서 무르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들인 말슴은 ‘젓 주셔요’ 하는 그 소리엇지오마는 그것은 ‘으아−’ 하는 울음이엇나이다” 하겟나이다 다른 말슴도 만치오마는…
(중략)
한머니 산소 압헤 꼿 심으러 가든 寒食 날 아츰에
어머니께서는 王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러고 귀밋머리를 단단히 따어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모ㅅ죠록 울지 말어라”
아− 그때부터 눈물의 王은!
어머니 몰내 남모르게 속 깁히 소리 업시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엇소이다
누−런 떡갈나무 욱어진 山길로 허무러진 烽火뚝 압흐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불으며 어실넝거릴 때에 바위 미테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연하고 안젓더이다
아−뒤ㅅ동산 將軍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만히 王의 눈물을 실고 갓는지요
나는 王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러케 王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王!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음 잇는 땅은 모다 王의 나라로소이다
<나는 王이로소이다>, ≪초판본 홍사용 시선≫ 56∼58쪽